공공의 적이 있어야 집단이 단단해지고 구성원들 서로 끈끈해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학적인 현상(?)은 소규모, 그러니깐 내가 다니는 ㅈㅅ기업같이 작은 회사에서 특히 잘 살펴볼 수 있다.
매일 나에게 타인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AA아, 잠깐 시간 돼? 나 너무 답답해. BB가...
그녀는 나를 편하게 생각했고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역시 사람은.. 너무 잘 해주면 안돼.. 후회해 봤자야 이 ISTJ야!!
그녀는 화통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 무례하다기 보다는 화통하고 화끈하고 시원시원한 스타일.
그녀가 박수치면 나도 따라 박수치며 비위를 맞췄고 우린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출근을 하고 PC를 켜고 물을 한 잔 떠 오면 그녀에게 메시지가 와 있다.
BB가 일을 이렇게 해놨더라? 이건 이렇게 했어야 하는거 아니니? 근데 왜 이러는거야 정말.
하루 종일 하소연을 들어주면 그녀는 퇴근할 시간 쯤 돼서 속이 좀 풀린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그때에도 잘못된 것을 몰랐다.
아 이렇게 나한테 얘기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그걸로 됐지 :) 뭐 이런 ㅄ가 다 있나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누군가를 욕하는 사람.
그렇게 욕할 대상과 욕을 쏟아낼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
험담하는 대상을 찾기란 그녀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BB는 일을 못하고 말도 우물쭈물해서 답답해 → 빠릿빠릿하게 내 눈치를 못 살펴
CC는 너무 나대고 윗사람한테 알랑방구가 심해 →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난데 쟤가 오니 내가 밀린 느낌이야
DD는 앞에서는 친한 척 하고 뒤에서는 남 욕만 하고 다녀 → 내가 이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으로서 착실히 그 쓰레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아 진짜요? 와 정말 별론데요..
아 헐 그런 말을 했어요? 대박이다..
맞아요 좀 그런 면이 있어요..
저도 그 사람 이상하더라니깐요..
나는 그녀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서서히 타인을 욕하는 행위에 빠져들고 있었다.
재미를 느끼고 있었고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녀와 함께 EE를 욕하며 칼춤을 추고 있었다.
EE는 착한 사람이었고 나나 그녀처럼 자기 아랫사람들과 격의 없이 잘 지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를 욕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주가 흐르고 EE를 헐뜯다 내가 먼저 선을 넘고 말았다.
그 당시 그녀와 내가 속한 '욕 집단'의 격려 속에 나는 행동대장이 됐고
마냥 신난 나는 EE에게 '버릇'없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오만방자했지만 그는 그런 나를 비롯해 그녀와 '욕 집단'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그러운 EE는 면담이라는 명목 하에,
사실은 '너네 나 좀 그만 괴롭혀 나는 너네를 자를 수 있지만 그냥 잘 지내고 싶어'
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나는 EE 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나의 행동을 반성했다.
십수년간 찌질하게 공부만 하고 살아 온, 어디가서 가정교육 잘 못 받았다는 소리 한 번 안 들어 본,
조용하면 조용했지 나대는 성격은 절대 못 되는 내가 뭐라도 되는 것 마냥 EE의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단점을 뽑아내고 지적하고 조롱했다.
내가 잘못해도 한참을 잘못했구나.
'EE와 일대일로 이야기 해보니 EE의 입장도 이해가 됐어요 왜 그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오해를 풀었어요.'
그녀는 이런 나의 태도가 흡족했을까?
'그래~ 너는 풀렸을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안 변해. 고집불통에 내로남불이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로 그녀와 나는 EE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꺼내기 어색해졌다.
함께 누군가를 욕하던, 누구보다 뜨겁던 사이가 뜨뜨미지근하게 식어갔다.
그 즈음 내가 속한 팀에 변화도 생기고 일도 많아졌다.
욕할 시간도 없이 바빠졌고 '즐거운 남 욕'에 동참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면서 서서히 감정 쓰레기통, 행동대장이라는 타이틀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회사 대표와의 면담에서 그가 그녀를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남욕은 너무나 재밌고 지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적당히란 없다.
그걸 아는 나는 그냥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내기로 했다.
그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녀를 갱생의 길로 인도하고 우리 같이 착하게 살아봐요 했어야 했는데
손절이 답은 아니었을 텐데
나 혼자 빠져나왔다.
욕의 구렁텅이에서.
이제 그녀의 '욕 대상'은 내가 됐다.
그래 실컷 욕해라 그것이 너의 삶의 의미다.
그녀와 그녀가 속한 '욕 집단'은 오늘도 나를 욕하며 더욱 견고해진다.